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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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놈놈놈상영회후기1] 병헌씨, 와 주셔서 고마워요!
작성자 : 제비꽃 등록일 2009.07.23 조회수 5252

폭우에 발이 젖고, 세찬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금새 잊었습니다. 오랜만에 와보는 고향 왕십리 전철역의 미로같은 길을 헤집고  극장을 찾아 온 길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들뜬 마음에 내키지 않아 저녁 식사를 거른 것도 집에 돌아와 앉아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기다림의 무게를, 당신은 그 사뿐한 발걸음으로 한 번에 날아가게 해주셨습니다. 하늘을 무겁게, 가득 채우고 있던 먹구름을 몰아내듯, 그렇게 우리에게 밝은 웃음을 웃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단념하며, 영화 상영이 시작되고부터는 혹시나 기다리던 마음 속 깊은 곳의 희망을 언제나처럼 접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작년 여름, 돈황 사막의 모래바람과 싸우며 찍었던 영화 <놈놈놈>에 집중해서, 여러 차례 보았지만 나의 편견 혹은 오해로 놓쳤던 재미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또 다른 감동과 재미를 찾아낼 수 있었지요.


즐겁게 영화를 보고, 바른손 영화 관계자들의 행사 준비과정을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회자 연단과 테이블, 그리고 의자 네 개가 배치되었습니다. 그 의자의 주인공에 병헌씨가 있을까를 추측하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흥분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스크린 옆 출구로 얼핏 얼핏 보이는 배우들의 머리 끝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으며 마음은 타들어가는 듯했습니다. 왠지 문 밖에 당신이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이 빠졌던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습니다.


김지운 감독님, 정우성씨와 두 배우들이 들어오는 순간 당신이 올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자 맥이 빠지며 의자 깊숙이 기대앉아야 했습니다. 남은 의자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비를 뚫고, 그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서까지 올 수는 없는 이유들을 되짚어 보고 인정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의 빈 의자 하나도 놓여 있지 않은 무대였지만, 그 자리에 함께 한 감독님과 배우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감독님과 배우들의 인사, 그리고 질문과 답변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당신이 도착하기 전 오고 간 관객과의 대화에서, 당신은 전해 듣지 못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놈놈놈> 2편을 제작한다면 죽은 창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루버스팬의 질문에 대한 감독님의 답변입니다. 김지운 감독님은 사이보그 창이를 만들지, 혹은 손가락이 잘렸으니 손가락을 붙인 창이로 부활시킬 것인지에 대한 재미있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다른 영화에서처럼 쌍동이 형제가 살아 있었던 것으로 할지도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만약 이런 제안이 김지운 감독님으로부터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관객 질문 때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저도 작은 피켓을 멋지게 만들어가야겠어요. 그래야만 질문의 기회가 빨리 올 것 같거든요. 이리 저리 궁리 중입니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유쾌하게 웃고 당신의 빈자리의 크기를 잊으려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정우성씨는, 자신의 질의응답 차례가 돌아왔을 때, 여러분이 기다리던 죽은 창이가 왔습니다.라는 멘트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헌씨의 입장을 배려해 주었습니다. 순간, 객석은 정말 난리가 난 듯했습니다. 저 또한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 손을 들어 당신에게 인사했지요.


당신의 첫 인사에서는 피곤함이 묻어있는 목소리를 들은 듯 하여 마음이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목이 잠긴 것일까, 아니면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일까를 순간 염려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염려도 잠시, 당신은 예전의 그 목소리 그대로 곧 회복되었습니다. 왜 늦었는지를 설명해 주셨지요. 옷에 커피를 쏟아 급히 옷을 구해 갈아입고 오느라고, 폭우에 막힌 길이 더 늦은 것이라고요. 정말 다행이지요. 커피 쏟은 정도의 방해이었기에 당신이 오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불미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당신은 시종 언제나 그러셨듯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다시 김지운 감독님과 영화를 찍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단호하게 한 마디로 하지 않겠다고 답변했고, 다시 김지운 감독님의 똑같은 답변을 유도했지요. 그러나 다시 마이크를 넘겨받고, 감독님과의 깊은 우정을 강조하셨지요. 좋은 감독, 멋진 배우들과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연이겠지요.


영화 <놈놈놈>을 찍으며 힘들었던 순간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외국으로 영화 촬영을 떠날 스케쥴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놈놈놈>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촬영해야 했기에, 피묻은 옷을 입은 채로 비행기에 올라야 했던, 웃지 못할 순간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당신은 최근의 사진들에서 본 모습보다는 얼굴이 좋아 보였습니다. 먼 길 급하게 옷까지 갈아입고 와야 했지만, 당신이 들어서는 순간 어두운 무대 앞이 순간 환해진 듯 했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소감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빛깔, 어느 무늬의 셔츠도 잘 어울리지만, 그 날의 검은 셔츠는 당신의 빛나는 구리빛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하더군요.


당신이 손수 준비해오신 DVD를 추첨으로 나눠 줄 때에도 팬들을 깊이 포옹해 주시고, 단체 사진 촬영 전후로 몰려드는 팬들에게도 일일이 악수와 포옹, 대화를 나눠 주는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습니다. 그 날 루버스 식구들 중에서도 포옹과 악수, 대화를 나눈 분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팬들에 둘러싸인 당신을 지켜보다가 단체 사진 찍을 준비를 하기 위하여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바른손 부사장님께서는 혼자 진땀을 흘리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남아서 다른 사람의 사진 촬영을 방해하며 당신에게 말을 거는 팬은 신고하시겠다고 농담까지 할 정도였지요.


그 모든 일정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몇 겹의 줄을 서고 있을 때, 맨 앞에 앉았던 저는 다시 일어나 당신의 이름을 불렀지요. 병헌씨! 당신과 눈이 마주치고 머뭇거리던 저는 용기를 내어 손을 뒤로 내밀었고, 사람들의 몇 겹 대열을 지나 당신은 오른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의 손바닥은 약간 거칠었습니다. 운동을 하느라, 혹은 영화 촬영을 하느라 그런 것이겠지요. 단단한 손바닥의 느낌과 함께 당신의 체온이 저의 손을 죄이며 전해져 왔습니다. 아주 잠시였지만, 당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 두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아주 짧더라도 누군가의 눈에 정확하게 당신의 눈길을 집중할 줄 아는 멋진 눈동자가 있었습니다. 대충 보고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셨듯이 정확하게 보아야 할 사람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는 듯한 눈길로 정확하게 인사를 나눠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당신의 눈빛은 더욱 사람들을 매료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릿한 눈길로 보는 듯 마는 듯 하는, 산만하게 집중력이 흩어지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잘 생긴 형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혼잡스럽고 짧은 순간이었기에, 당신의 그 강하고 집중도 높은 눈길이 더욱 빛나고 돋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이더라도 흐지부지한 만남보다는, 이처럼 어렵고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팬 모두에게 집중하고 마음을 다하는 인사를 나누기에 당신과의 모든 순간들이 이토록 강렬한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당신과 멀리 떨어져 사진을 찍어야 했지만, 기쁜 마음이었나 봅니다. 촬영이 끝나고 다시 밀려드는 팬들에게 발까지 밟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뒤로 돌려 팬들에 둘러싸인 당신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제 갈께요, 병헌씨!, 당신은 순간 눈을 들어 오른손을 들어 멀리 내밀어 주셨고 다시 악수를 하고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